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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화가 엘그레코 현대미술 새로운 길을 열다

by 0**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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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이라고 하면 익숙함에 젖어 습관적으로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단어가 주는 뉘앙스 자체에 긍정적인 이미지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위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틴토레토, 치띠아노의 시대를 잇는 화가들 중에서는 르네상스의 습관을 계승하는 것 같지만 뭔가 다르고 그렇다고 새로울 것이 없는 양식이라 해서 혹평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엘그레코는 대표적인 매너리즘의 화가로 당시가 아닌 현대미술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재평가 되었다. 1541년 그리스 크레타에서 태어난 그는 베네치아에서 화가로서의 역량을 키우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감이 생긴 그는 틴토레토 등 로마와 베네치아 화가들 이후에 스스로 최고의 실력을 자신하며 능력을 펼칠 곳을 찾게 된다.

 

출신지 그리스는 이미 지난 시대의 장소이며, 이탈리아는 수많은 라이벌들이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열 해가지지 않은 나라 에스파냐로 향한다.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화가들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아닌 왕실, 귀족, 교회의 계약에 따라 대부분의 그림을 그렸으며 엘그레코의 희망은 에스파냐 왕실의 최고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1561년 이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를 수도로 정한 뒤 성채 엘에스코리알에 장식할 화가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당연스레 그곳을 향한다.

"성 마우리시오와 테베군의 순교" 1580-82 (스페인 엘에스코리알 산로렌소 수도원 )

2년여간의 수고 후 제출한 작품의 제목은

"성 마우리시오와 테베군의 순교"이다.

왕실 화가의 발탁과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였기에 같은 주제를 받아든 각자 화가들은 최고의 실력을 뽐내게 된다. 엘그레코 역시 자신의 작품을 완성한 후 누구보다도 뛰어난 결과물을 내었음에 자부하였으나 비정상적인 인체의 구도와 무엇보다도 성인의 종교적인 성스러움보다는 인간적인 갈등에 초점을 맞춘 그의 작품은 펠리페 2세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최고의 왕실 화가로서의 꿈은 접어야 했다.

 

왕실 화가로서의 꿈은 멀어졌으나 당시 또다른 예술 시장인 종교화 영역은 여전히 있었다.

톨레도라는 도시는 스페인 카톨릭의 총 본산 이기에 그곳으로 정착지를 정한 그는 평생을 그곳에 머물면서 종교화 (이콘 - 영어로는 아이콘)를 그렸고 대표적인 그의 작품들은 톨레도의 이야기와 함께 스페인에 남아있게 된다.

 

엘그레코의 "성 삼위일체" 1577-79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성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그려져 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듯이 가운데 누워있는 이는 예수님, 그를 붙들고 계시는 노인분은 성부 하나님 그리고,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런데 당시의 일부 주교들은 이 그림을 못마땅해 했다. 성부 하나님의 모자가 로마 카톨릭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모자가 아닌 왜 두갈래의 모자를 그렸는가? 이는 그리스 정교회 수장의 모자이다. 그리스 출신인 그는 "도메니쿠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 대신에 엘그레코를 사용하였는데 이름이 너무 어려워 스페인 사람들이 발음하지도 읽지도 못하면서

그리스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정관사 '엘' 다음에 그리스 사람이라는 일반명사 '그레코'로

불리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을 통해 드러낸것이다. 이름은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 정체성은 그림을 통해 유지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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